2013년 2월

 

먹칠이와 배트를 기억하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습니다. 작년 겨울 처음 만났던 길고양이들 중 유난히 유쾌했던 동네 친구들이었죠. 개성 있는 밀리터리룩에 콧잔등에는 먹이 한 방울 떨어져 있던 먹칠이와, 보기 드문 올블랙 코트를 입고 먹칠이에게만 유독 짓궂은 장난을 치던 배트. 맨날 티격태격하지만 어딜 가도 함께 붙어있던 단짝 고양이들이었습니다. 올해 여름까지는 간간이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다가 갑자기 하지 않게 된 것은, 어느 날부터인가 녀석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놀이터에 나가기만 하면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녀석들인데. 이제는 마음을 먹고 동네를 샅샅이 뒤져봐도 녀석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2013년 3월

 

먹칠이와 배트의 안부가 궁금하다면 이곳에서 매일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챙겨주시는 할머니에게 물어보아도 좋았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 길고양이의 안부를 묻는다는 건 곧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니까요. 혹시나 나쁜 소식을 듣게 될까 봐 겁이 났습니다. 블로그에 가끔 먹칠이와 배트는 잘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에게도 아무 대답을 못 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내가 만나지 못하는 것뿐 잘 있을 거야,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벌써 다시 겨울이 왔네요.

 

 

 

 

2013년 8월

 

녀석들을 언제까지 안정적으로 볼 수 있었나 사진을 뒤져보니 올해 여름까지였더군요. 해가 어둑하게 지고 나면 놀이터 근처에서 어렵지 않게 녀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배트는 먹칠이에게 짓궂게 구는 것과는 달리 겁이 많아서, 늘 이렇게 먹칠이가 앞장서서 먹이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폭염이 길어져서인지 작년 겨울과 다르게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걱정을 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2013년 3월

 

다시 겨울이 오면 이렇게 놀이터 담벼락에서 식빵을 굽는 먹칠이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창 더위에 지쳐 말라있었던 때를 마지막으로 더 볼 수가 없으니 애만 탈 뿐이었습니다.

 

 

 

 

2013년 10월

 

몇 개월이 지나고 녀석들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점점 사라지고 있을 무렵.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큰 행사가 있어 몇 달 전부터 꼭 가겠다고 약속을 했었던 터라,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한 뒤 빠져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려는 데 어머니가 잠시 교회의 아는 분에게 할 말이 있다고 들어가셔서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죠. 그러다 문득, 여기에서도 가끔 먹칠이와 배트가 돌아다니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자동차 밑을 보고있는데 익숙한 까만 몸집과 노란 눈동자. 배트로 보이는 올블랙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이고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혹시 다른 고양이 아닌가? 싶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먹칠이 없는 배트는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더 낯설었죠.

 

 

 

 

2013년 10월

 

그런데 그 순간,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거짓말 같게도 먹칠이가 나타났습니다. 배트에게 사람이 접근하자 가까이 다가와 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반가움도 잠시. 여름이 지나면 다시 털이 풍성해지고 살이 오를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과 달리, 그때보다 더 마르고 작아진 모습이었습니다. 게다가 길고양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장난기가 많았던 녀석들인데. 반년 만에 만난 녀석들은 눈빛도 태도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2013년 10월

 

누군가가 자동차 밑에 사료를 담은 비닐봉지를 던져주고 간 모양인지 제 눈치를 살피며 함께 그걸 먹기 시작하는 먹칠이와 배트. 놀이터 한 켠에서 자연스럽게 먹이를 먹던 모습이 참 보기가 좋았었는데, 이제는 자동차 밑에 숨어서도 멀리 떨어진 인간을 경계하느라 편치가 않아 보입니다. 사라졌던 고양이들이 몇 개월만에 나타났으니 반가움이 제일 커야 할 텐데, 빨리 자리를 비켜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2013년 2월

 

놀이터 담벼락에서 무심한 듯 꾸벅꾸벅 졸며 햇빛을 받던 먹칠이. 겁 많고 소심하면서도 늘 먹칠이에게는 만만한 듯 장난을 치던 배트. 어느 날 저녁거리를 사려고 편의점 다녀오는 길에 녀석들을 만나 소시지를 강탈 당했던 기억. 생일이었던 날 선물 받은 케이크를 들고 집에 오는 길에 먹칠이를 만나 빵만 떼어줬다가 솜방망이 펀치로 손등을 맞았던 기억. 녀석들과의 장난스럽고 유쾌했던 기억들이 다 엊그제 같은데, 다시 만난 녀석들은 예전에 알던 고양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길에서 살아가기엔 경계심이 강한 게 더 안전할 테지만, 글쎄요. 그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니 기쁜 마음으로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녀석들은 여전히 살아있고, 여전히 함께 있습니다. 영역을 옮긴 곳에서도 부디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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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Favicon of https://katzen.tistory.com 고양이두마리
    2013.12.30 09:39 신고

    이래서 저는 요즘 바깥아이들 일부러 (?) 안 만나요
    시간 돼서 밥 내가고 후딱 들어와 버리지요... .ㅜ.ㅜ
    먹칠이 (코에 숯팩 한 녀석 맞지요?)가 눈에 많이 남아있는데...

    • Favicon of https://rach02.tistory.com 라흐 
      2014.01.01 11:30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이 지역 캣맘께서 제 글을 보시는지 지난주에 먹칠이를 보았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아마도 영역을 조금 위쪽으로 옮긴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자주 볼 수는 없겠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요!

  2. Favicon of https://meeoow.tistory.com 괭인
    2013.12.30 10:01 신고

    라흐님, 정말 속상하셨을 것 같아요. 저도 읽으면서 안타까움이 느껴지네요.
    안타깝긴 하지만 위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험한 세상에 살기에는 조심스러운 성격이 더 낫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살아남아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 Favicon of https://rach02.tistory.com 라흐 
      2014.01.01 11:32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네 길생활이 워낙 험하니.. 그래도 햇살 좋은 날에 담벼락에 기대 졸고있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고 그립네요. 지금은 나쁜 일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만 지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3. 해피로즈
    2013.12.30 12:01

    그래도 잘못되진 않고 저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참 감사하네요.
    둘이 계속 같이 붙어다니는 것도 반갑고..
    무슨 일을 당하고 얼마나 힘들면 저리 말랐을까, 맘이 아립니다..

    • Favicon of https://rach02.tistory.com 라흐 
      2014.01.01 11:35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네. 확실히 동물들도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얼굴에서 티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표정이나 태도가 너무 달라져있어서 마음이 덜컹 했어요. 그래도 주변에 계신 분이 최근에 먹칠이를 만나 먹이도 주셨다는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좀 놓이더군요.^^ 워낙 붙어다니는 녀석이라 배트도 잘 있을거라 믿어봅니다.

  4. Favicon of https://salt418.tistory.com +소금+
    2013.12.30 17:07 신고

    먹칠이는 참 매력적이에요.. 얼굴도 이쁘구~~
    안부를 묻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에 맘이 더 짠해져요... 그냥 어딘가에서 잘 지내겠거니 여기고 싶지만 걱정이 되네요...
    둘 다 안 보이는거니 둘이서 영역을 옮긴 거였음 좋겠어요...
    길냥이에게 마음을 주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요... ㅠㅠ

    • Favicon of https://rach02.tistory.com 라흐 
      2014.01.01 11:38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네 영역을 아주 조금 옮긴 것 같아요. 원래 있던 지역에 고양이들이 워낙 많았거든요. 그래도 두 녀석이 늘 붙어다니는 걸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놓여요. 길고양이에게 마음을 주다보면 너무 힘든 날이 많아서 되도록 먹이만 주려고 하는데 잘 안되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