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인간의 도시에서 더부살이하듯 눈치 보며 살아가는 길고양이이지만, 녀석들이 오직 생존만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인간 세상에 다양한 군상이 존재하듯 녀석들도 최소한의 굶주림만 해결이 된다면 꽤나 다채로운 고양이의 삶을 살아간다. 식물을 대하는 방식도 각양각색. 심심하거나 소화가 안 될 때마다 씹어먹는 용도로 쓰는 누렁이 같은 녀석이 있는가 하면, 지친 어미묘의 삶에 유일하게 남은 호기심인 듯 관심을 보이던 야옹이, 햇살 좋은 날에 들풀을 베개 삼아 낮잠을 즐기던 근엄이까지.

 

 

 

 

"향기가 좋다옹" 길가에 핀 들꽃 향기를 맡고 있는 얼룩이.


그리고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꽃향기를 즐길 줄 아는 이 시대의 진정한 낭만 고양이, 얼룩이의 이야기다. 녀석의 식물 사랑이 평범하지 않단 걸 처음 알았던 건 대략 2년 전, 얼룩이가 태어난지 6개월 정도가 되었을 때다. 출근길에 집 앞을 나서는데 녀석이 회사원인 나보다 더 급한 모양새로 어딘가를 후다닥 뛰어가는 게 아닌가. 뒤를 쫓아갔더니 녀석은 어느 큰 화단에서 발걸음을 멈추었고, 이내 질겅질겅 들풀을 씹어먹기 시작했다.

 




"작년에 피었던 그 꽃이 아니냥?" 애잔한 눈빛으로 대하는 걸 보니 아는 들꽃인 듯,


그때까지만 해도 '고양이가 풀 뜯어 먹는 소리 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짜군' 하고 웃으며 지나쳤지만. 녀석의 식물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져 작년 이맘때쯤에는 마치 조경 관리라도 하는 양 동네의 들풀마다 죄다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2013/08/19 - [길고양이] 우리 동네의 조경은 내가 책임진다옹! 놀리기엔 녀석의 표정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들풀을 잡초라며 쉽게 밟고 지나치기도 했던 인간의 기억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킁킁.. 향기롭다옹" 우아한 표정으로 냄새를 맡는 얼룩이.

 

그런 모습을 보며 다음 해에도 이 자리에서 녀석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시큰해졌었는데. 겨울에 심한 허피스에 걸리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무사히 한 해를 지내고 다시 여름이 왔다.

 

 

  

 

"꽃향기 맡는 고양이 처음 보냐옹..?" 들풀을 닮은 얼룩이의 눈.

 

얼룩이가 좋아하는 들풀도 시멘트가 부서진 구석마다 머리를 내밀고 다시 힘껏 자라고 있다. 덕분에 녀석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져 종일 들풀을 찾아 동네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즐거워진 인간은 녀석을 졸랑거리며 쫓아다닌다.

 

 

 

 


 올해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내년에도 무사히 이곳에서 꽃향기 맡는 낭만 고양이를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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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 Favicon of https://salt418.tistory.com +소금+
    2014.06.23 08:56 신고

    무엇이든 고양이와 함께 있으면 작품이 된다는데 그 중 꽃이 단연 으뜸인 것 같아요~~ ^^ 얼룩이와 들꽃은 삶도 닮아보여요~
    꽃향기를 즐기고 창밖 풍경을 즐기고~ 냥이들은 정말 낭만적이에요~~ㅎㅎㅎ
    이제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될텐데 얼룩이도 누렁이도 근엄이도 모두 건강히 여름 났음 좋겠어요~~ㅎ

    • Favicon of https://rach02.tistory.com 라흐 
      2014.06.23 17:40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그러게 말이에요. 가을이도 얼마 전 창가에 서서 묘생을 생각했다죠? ㅎㅎ 여름도 나름대로 고생스럽지만 겨울보다는 병치레가 적어서 마음이 비교적 편하네요.^^

  2. 김현철
    2014.06.23 11:31

    라흐님 매일 보이던 냥이가 보름정도 안보이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삼일정도 못본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안보이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자리에 다른 냥이가 자리를 잡고 있구요. 요즘 마음이 심란합니다.

    • Favicon of https://rach02.tistory.com 라흐 
      2014.06.23 17:37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저런....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늘 보이던 길고양이가 보이지 않는 경우는 대부분 아프거나, 영역을 옮긴 경우인데요. 작년 겨울에 얼룩이도 일주일 정도 안 보여서 찾으러 다니다가 주차장 구석에서 아픈 녀석을 발견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영역을 옮긴 경우인데.. 찾으시는 고양이가 수컷인가요? 수컷은 때때로 영역 다툼에 밀려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하고, 또 영역이 암컷보다 5배쯤 넓어서 별다른 일 없이도 무척 돌아다니기도 하더라구요. 후자였으면 좋을 텐데..
      저도 애타게 기다려본 적이 있어서 마음이 쓰이네요.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경우도 많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요.. 좋은 소식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 김현철
      2014.06.24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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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컷 입니다. 안보이기 얼마전부터 털에 윤기도 없어지고 생기가 없어보였습니다. 오늘 아파트 청소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안그래도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아무일 없었다는듯 나타나면 좋으련만 자꾸 나쁜 생각이 듭니다.
      라흐님 말대로 영역 싸움에서 밀려 났을수도 있으니 조금 넓게 찾아 봐야겠습니다.

  3. 쿠로코코
    2014.06.25 12:55

    부디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라흐님 글 통해 예쁜 얼룩이와 함께이기를..